서양철학사/근세철학

버클리_발제문

달빛이내린다 2018. 11. 3. 12:40

들어가며

다음 세 가지 가정이 참이라고 해보자. 첫째, ‘물질이 실제로 존재한다. 둘째, 우리의 지식의 주요한 근거는 직접 지각한 관념 또는 표상들이다. 셋째, 그러한 관념 또는 표상의 원인은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 두 가지에 대해 회의주의에 빠질 위험이 크다. 첫째는 지식에 대한 회의주의이다. 물질은 지각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특징을 보여준다. , 지각자에게 자신에 대한 관념(또는 표상)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지각자는 그러한 물질에 대한 지식을 가진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지식은 자주 오류를 일으킨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 가능성을 우리 자신의 지각 태도를 변경함으로써 감소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각의 과정에 있어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신에 대한 회의이다. 만약 물질이 정신과 정신이 지각한 관념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면, 굳이 신의 존재는 필요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버클리는 위의 첫째 가정을 거부한다. 이로부터 셋째 가정은 자동적으로 거부된다. 그러나 동시에 둘째 가정은 거부하지 않는다. 이로써 위에서 제시된 두 가지 회의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처럼 버클리는 상식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경험론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살펴보자.

 

1.    생애

버클리(1685~1753)는 아일랜드 태생으로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과 논리학, 철학을 배웠다. 1734년에는 주교가 되었다. 그의 주요한 철학 저서로는 신시각론(1709), 인간 지식의 원리론1710, 하일라스와 필로누스가 나눈 대화 세 마당(1713)』이 있다.

 

2.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버클리의 주장은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 To be is to be perceived.’로 요약된다. 이러한 주장은 어떻게 가능한가? 발제자는 버클리에 대한 이해를 쉽게 나아가기 위해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들고자 한다.

예시1

우리는 x가 존재한다고 말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카페 가온누리(이하 가온’)’가 존재한다. 한여름 충무로에서 명진관까지 올라온 사람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욕구하며 가온의 존재성을 기대한다. 하지만 올라와보니 가온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사람은 의아해 하겠지만 가온이 존재한다는 자신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에 대해 충격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충분히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가온이 존재한다가 아니라 가온은 존재했었다는 믿음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x는 존재한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 일상적으로 의미하는 바이다. 이러한 사용에 따르면 ‘x’의 존재성에 관한 표현이 가지는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정의1.1 ‘x는 존재한다’ =df x는 지각자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다.

정의2.1 ‘x는 존재했다’ =df x는 지각자에 의해 지각된 적이 있다.

예시1에 따라, 우리는 정의1.1과 정의2.1이 구분된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 x에 대하여 ‘x는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x는 존재했었다또는 ‘x는 존재할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과거의 사실로부터 추론한 불확실한 믿음의 표현일 뿐이다. 현재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 사물, 사태에 관하여 ‘x는 존재한다고 우리는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앞선 문장이 과거의 사실로부터 추론된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이지, ‘x는 존재한다가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예시1에 대하여 유물론자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를 반박당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유물론자들 또한 가온의 존재에 관한 위의 예시에 대해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다음을 보자.

예시2

가온에서 어떤 사람이 책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생각하고 있다. 이때 그 사람이 지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a)하얀 연기를 내는 검은색 물체가 보인다. (b)어떤 향기가 난다. (c)쓴맛이 난다. 이러한 지각으로부터 그 사람은 커피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고 하자.

예시2의 마지막 문장 다음에 다음 문장 –‘커피가 없어졌다’—을 추가할 수 있을까? 추가적인 설명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커피가 없어졌다고 쉽사리 말할 수 없다. ‘커피는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분명히 불확실한 믿음에 불과하지만 예시1가온의 존재에 대한 믿음보다는 훨씬 더 강력한 믿음이다. ‘커피는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확실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유물론자들은 이것이 바로 커피가 물질로 이루어진 사물이기 때문이며 피지각에 관계없이 절대적인 존재를 가지기 [1]때문이라고 답한다. 한편 버클리는 이것이 다른 지각자의 지각, 즉 신의 지각 때문이라고 답한다. 우리는 방 안에 혼자 있을 때에도 잠시 한 눈 판다고 해서 커피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경우 신이라는 지각자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에시1과 예시2를 통해 버클리의 생각이 어떠한지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다음 절들에서 발제자는 『소크라테스부터 포스트모더니즘』 버클리 장을 따라가며 『하일라스와 필로누스가 나눈 대화 세 마당』에서 근거를 찾고자 한다.

 

2.2.       물질의 부정

버클리는 우리가 커피를 구매하여 마실 수 있는 이유, 한눈 판 사이에 커피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에 대한 유물론자들의 설명을 거부한다. ‘물질의 존재는 우리가 확신할 수 없는 임의적 가정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가정 자체가 말도 되지 않는 짓이라는 것이다. ‘물질의 존재에 대한 버클리의 반박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1)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관념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념과는 다른 특징을 갖는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1-2)물질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관념과는 다른 특징을 갖는 대상인 물질과 관계되는 연장’, ‘무게’, ‘거리을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연장’, ‘무게’, ‘거리등이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는 모순에 빠진다.

논증에 앞서 버클리는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이차적 성질일차적 성질개념 구분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뜨거움’, ‘’, ‘냄새’, ‘소리’, ‘등을 직접적으로 지각하는데, 이것들을 이차적 성질이라 부른다. ‘연장’, ‘무게’, ‘운동’, ‘정지등을 우리는 직접 지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물질이 정신 외부에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 이러한 물질이 필수적으로 가지는 성질들이다. 이것들을 일차적 성질이라 부른다. 따라서 일차적 성질을 우리가 직접 지각하거나 그것의 존재성을 밝히는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면 물질의 존재 또한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버클리는 다음 두 가지를 전제한 후 논증을 시작한다.

P1 이차적 성질들은 직접적으로 지각된다.

P2 이차적 성질들은 이것을 지각하는 정신 안에 있다.  

(1)  이차적 성질의 원인으로서의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론1)

이차적 성질들은 정신적이다. 이차적 성질들이란 뜨거움, , 냄새, 소리, 색을 말한다. 우리는 분명히 뜨거움을 느낀다. 이러한 뜨거움은 우리 정신 안에 있다. 뜨거움의 원인이 정신 밖에 물질로서 존재한다는 입장은 무리가 있다. 이러한 입장은 다시금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첫째, 우리가 느끼는 뜨거움의 성질이 이것의 원인이 되는 물질 안에 존재한다는 입장이며 둘째, ‘뜨거움의 성질이 이것의 원인이 되는 물질 안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뜨거움의 원인이 되는 물질은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버클리는 먼저 첫째 입장을 논박한다. 뜨거움은 분명히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지각자가 아닌 물질 안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각능력자가 관념을 가지거나 밖으로 내보낸다는 것은 가능할 수 있지만, 돌멩이와 같은 지각 무능력자가 만약 존재한다고 해도 이들은 관념을 가질 수도 없고 밖으로 내보낼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43

둘째 입장 지각된 연장은 지각자의 정신에 전적으로 의존하지만 이것의 원인이 되는 물질은 존재한다은 가능하다. ‘지각된 연장감각적 연장’, ‘원인이 되는 물질절대적 연장이라 부른다. 버클리는 다음을 전제한 후 논증을 진행한다.

P3 그 어떠한 감각도 제거된 절대적 연장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다 절대적 연장이라 불리는 정신과 독립적인 연장은 존재한다.

증명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 감각(지각)에도 의존하지 않고 연장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정한 면적, 부피를 차지하는 어떤 대상을 상상하기 위해 우리는 어린왕자가 박스를 그리는 것처럼 허접하게나마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그린다. 이때 우리는 감각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감각에 의지하지 않고는 연장에 대해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이차적 성질과 일차적 성질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  일차적 성질 자체 또는 그것의 원인으로서의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론2)

이러한 결론은 연장의 경우를 증명함으로써 내려진다. ‘운동’, ‘무게등의 존재는 연장이라는 정신-독립적 존재의 전제 위에 있기 때문에 연장의 정신-독립적 비존재를 증명하면 된다.[2]

증명에 앞서 다음을 전제한다.

P4 어떤 한 물질은 오직 하나의 연장을 가진다. (마치 발제자가 시각 t10.17m인 동시에 0.18m일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증명

가정1연장의 원인이 정신 밖에 물질로 존재한다. 이를테면 철수의 손이 물질로서 존재한다. 물질로서의 철수의 손을 영희와 개미 각각이 지각했다고 하자.

그런데 영희가 지각한 철수의 손의 크기와 개미가 지각한 철수 손의 크기는 서로간의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영희가 지각한 철수 손의 연장과 개미가 지각한 철수 손의 연장은 각각이 모두 철수 손의 참된 연장이다. 그런데 이것은 P2에 어긋난다.

따라서, 가정1은 틀렸다.

 

2.3.       신의 지각

예시2에서 보았듯, 방금까지 존재했던 커피를 내 앞에 두고 잠시 한눈 판다고 해서 커피의 존재성이 불확실해지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버클리는 물질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커피의 지속적인 존재성을 설명하고자 했다. 커피의 지속적인 존재성을 거부하는 것이 비상식적이라는 이유 때문도 있었겠지만 앞선 절에서 언급된 것처럼 버클리는 직접적으로 지각된 것들에서부터 지식을 쌓아올리자는 태도를 가진다고 했다. 그런데 누구라도 일생을 살면서 방금 산 커피가 없어지는 현상을 직접 겪는 일은 매우 드물다.

버클리의 의도는 물질이 제거된 자리에 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에 설명력을 높이고자 한 것이 아니다. 버클리는 우리는 x를 직접적으로 지각한다는 사실로부터 ‘x는 무한한 정신인 신으로부터 지각된다는 사실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고 생각한다. 버클리는 물질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자들 뿐만 아니라 의 존재를 우선적으로 상정하는 자들 또한 비판한다.[3]  

그렇다면 이 세계는 무엇으로 구성되며 어떻게 존재하는가? 버클리는 앞선 절에서 제시된 전제로부터 이 질문에 대해 답한다.

P1 이차적 성질들은 직접적으로 지각된다.

그런데 우리는 의지, 상상, 지각 등의 정신활동을 한다. 의지나 상상은 능동적이며 지각은 수동적이다. 지각은 상상보다 뚜렷한 것이다. 지각된 것들은 그 자체든 그것들의 원형이든 우리 정신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이것들을 산출하는 무한한 정신이 존재한다.

버클리는 직접 지각하는 것들의 존재로부터 그것들을 산출하는 무한한 정신의 존재를 추론한다.그리고 자신의 주장은 오직 이뿐이지 그 이상의 것 인간의 정신은 무한한 정신의 안에 있다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3.    과학적 지식의 성격

버클리에 따르면 직접 지각되는 것만이 존재한다. 또한 버클리는 이것들을 가장 확실한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들어가며 에서 발제자가 언급했듯이 버클리의 결론을 따랐을 때 지식에 대한 회의주의를 거부할 수 있다. ‘직접 지각되는 것들을 주요한 근거로 삼는 경험과학은 물질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 같은데 버클리는 경험과학을 긍정해야 하는가? 버클리는 이에 대하여 『하일라스와 필로누스가 나눈 대화 세 마당』 2장에서 자신은 과학에서 다루는 개념들의 실재성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과학의 유용성을 인정한다고 밝힌다. 버클리에 따르면 물리학의 기본 단위 또는 개념인 질량[M], 시간[T], 거리[L], , 중력, 인과율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버클리가 반박하고자 하는 것은 과학을 근거로 한 철학적 유물론이다. 과학을 우리가 지각하는 관념과 관념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학문이라 본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과학이 실재하지 않는 개념, 단위를 가지고 탐구한다는 점과 과학이 현상에 대하여 유용하다는 점을 근거로 과학에서 특정한 존재론을 이끌어내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첫째, 과학이 제공하는 지식은 유용하며 가치있다. 둘째, 과학에서 사용하는 개념, 단위 등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며

버클리의 핵심적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신-독립적 존재로서의 물질개념은 임의적이다. 둘째, ‘물질개념 자체를 가지는 것 자체는 불가능하다. 셋째, 우리의 정신이 수동적으로 지각하는 관념의 원인으로서 무한한 정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발제자는 첫째 결론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둘째, 셋째 결론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둘째 결론의 경우 버클리는 마치 순수한 논리적 증명을 수행하는 것처럼 논증을 진행한다. 하지만 경험적 사실에 있어서 순수논리적 증명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버클리의 실제 논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버클리는 상황에 따라 모든 가능한 경우Case를 다 따지며 논증하지 않는다. 셋째 결론의 경우 발제자는 인간 정신이 수동적으로 지각한다는 관념들을 산출하는 다른 정신이 존재해야 한다는 점은 이해 가지만 그러한 정신이 무한해야 한다는 것을 버클리가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버클리, 『하일라스와 필로누스가 나눈 대화 세 마당』, 한석환 역, 숭실대학교 출판부

스텀프, 『소크라테스부터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열린책들



[1] 소크라테스부터 포스트모더니즘까지, P404

[2] 하일라스와 필로누스가 나눈 대화 세 마당191

[3] Ibid, 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