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실재'를 알 수 있는가? 어떤 철학자들은 현상 또는 현상으로부터 추상화한 논리를 발판삼아 실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러한 방법이 '비유' 또는 '논증'으로 시행/제시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발판으로 삼은' 사다리를 오른 다음에 그 사다리를 던져 버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의 사다리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일종의 비유이다. 나는 이러한 비유에 있어 문제를 느낀다.
철학이 논증일 경우, 문제는 사다리가 썩었다는데 있다. 철학적 논증은 수학적 논증만큼 엄밀하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애초에 그러한 사다리를 발판 삼아 실재에 이를 수 없다.
철학이 일종의 비유일 경우, 나는 이러한 철학의 객관성을 믿지 못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은 꽃을 관찰하며 사랑을 찾는 얼간이는 없다. '꽃'은 그저 '사랑'의 상징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상징의 의미를 알기 이전에 상징이 뜻하는 바, 즉 실재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비유에 있어 상징물 이전에 이 상징물이 의미하는 바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이지 넌센스다. 하지만 한 발 물러서서 상징물 이전에 이 상징물이 의미하는 바(=실재)를 미리 알고 있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어떤 것의 실재 또는 실재 자체에 대해 사람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한다면 우리는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가? 우리에게 '흰 비둘기'는 '평화'다. 하지만 전쟁 중에 치명적인 총상을 입고 쓰러진 사람 앞에 내려앉은 '흰 비둘기'는 그냥 '씨발 비둘기'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 것 같다.
"내가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교과서가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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