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내가 경험해본 바에 따르면, 플라톤의 말은 존재론적으로는 틀릴 수 있어도(이 점이 바로 플라톤이 재미없는 핵심 이유다) 실천적인 면에 있어서는 분명 의미있다.
육체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자극 --시각, 청각, 미각, 촉각, 청각, 후각 등은 생존을 위해 발달했지만 어느덧 예민해진 이들 감각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더 맛보고 싶게 한다. 비단 이러한 자극 자체 뿐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한 어떤 경향성이 그러한 자극에 끌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관조 또는 발명을 통해 즐거움을 추구하게 할 이성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쾌락을 얻을까?' 따위의 물음에 그것의 시간을 집중한다.
오랜 세월동안 그러한 작업에 익숙해져 버린 이성은 점차 '참된 앎'을 추구함으로써 얻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더 많은' 쾌락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주진 못한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육체적 만족 이상을 추구하도록 양보하면, 욕망은 금세 우리가 얻고자 했던 쾌락에 익숙해져서 더이상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 욕망은 더 큰 쾌락을 요구한다. 이것은 노예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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