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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사/고중세철학

아우구스티누스(수정)


1.    생애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기독교인 어머니와 이교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삶에 이끌렸지만 그러한 삶이 결국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진 못한다는 것을 직감했고 행복하지 못한(비도덕적인) 원인인 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철학에 있어서는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었으나 확실성을 찾을 수 없었고, 종교에 있어서는 기독교가 아닌 마니교에 끌렸다. 왜냐하면 기독교에 따르면 신은 완전히 선한데 실제 세계에는 악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마니교에서는 세계는 근본적으로 개의 원리의 대립이며 개는 바로 선과 악이다. 선과 악의 대립의 일종으로는 영혼과 육체의 대립이 있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원했던 것은 첫째, '' 존재를 그럴듯한 이론으로 해명하고 둘째, 자신을 ''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기독교의 대안이었던 마니교의 이론 또한 앞서 제시된 가지 요구를 해결해주지 못했다. 근본원리로서의 선과 악의 존재는 신화적 또는 종교적 믿음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첫째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또한 선과 악이 근본 원리라면, 우리가 선해지기 위해 그리고 악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있겠는가?  그리하여 마니교도와도 이별한 그는 회의주의와 유물론의 입장에 끌리게 되었다.

30 이후에 그는 밀라노에 갔다가 위에서 적은 그의 가지 요구를 충족시킬 실마리를 찾는다. 그의 첫째 요구이를 이론철학적 측면이라 부르자대해서는 플로티누스의 <엔네아데스> 신플라톤주의가 답을 제시해주는 것 같았고, 그의 둘째 요구 -이를 실천철학이라 부르자- 당시 말라노 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가 그에게 전파한 기독교가 그러했다. 신플라톤주의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1)물질세계와 완전히 분리된 비물질세계의 존재(2)이러한 것들을 인간의 직관으로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플로티누스에게서는 (3)‘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결핍되어 나타난다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이론 위에 그는 (4)기독교에 대한 믿음을 첨가했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적 믿음이 서로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32그는 회의주의와 유물론을 극복하고 신에 대한 철학에 힘을 바칠 있게 되었다. 

위에서 요약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두 가지 요구를 가졌다고 했는데 이를 질문이라는 용어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Q1.은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는가?

Q2. 우리는 악을 어떻게 극복 또는 감소시킬 수 있는가?

 그런데 위 두 질문에 대해 답을 찾기 이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은 전제(존재론적)와 태도(또는 방법론)을 가진다고 요약자는 파악했다.

전제 P1. 신은 존재한다.

태도 At1. 근거 없는 믿음이 아니라 확실한 앎을 추구하자.

 At1.P1과 결합하여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Q1.에 대해 철학적 대답을 하게 만들었다.

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30세 이전에 마니교와 이별하고 나서 회의주의와 유물론의 입장에 끌리게 되었다고 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마니교가 At1.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여전히 P1.에 대한 일말의 믿음이 있었겠지만 At1에 대한 요구를 위해 먼저 그는 회의주의를 극복해야 했었을 것이다.

 

2.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1. 회의주의의 극복

그가 회의주의 극복의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다음 두 가지 확실한 사실이었다. (1)무모순율. 사물은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에 의하면, 만약 세계가 ''라면, 세계는 유한하거나 무한한데 동시에 유한하며 무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앎은 확실하다. (2)회의하는 사람이 회의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회의주의를 극복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첫째, 현상과 구분되는 실재Reality 존재한다. 둘째, 우리는 실재를 있다.

P2 현상과 구별되는 실재는 존재한다.

그런데 Q1. (‘은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는가?)이 요구하는 것은 (1)세계의 작동원리 (2)’의 정의 (3)세계와 악의 관계 등일 것이다. 따라서 Q1.은 존재론적 질문이다. 그러나 회의주의를 극복한 이 시점에서도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밖에 없다. 세계, , 실재 등이 ’, ‘어떻게존재하는지 답하기 이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적 물음에 대해 답해야 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요구는 At1.에 따른 것이라고 요약자는 파악한다.)

Q1.2.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2. 지식의 단계, 인식의 단계

인간의 앎은 그것의 확실성에 따라 최하위에서 최상위의 단계를 가진다. 먼저 최하위의 지식에 해당되는 것은 현상에 대한 앎이다. ‘현상에 대한 앎은 감각 대상을 우리의 감각 기관으로 받아들인 지식을 말한다. ‘현상에 대한 앎이 확실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현상(감각 대상)과 인간의 감각 기관 모두 상황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식은 현상에 대한 앎에서 실재에 대한 앎으로 나아간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한 사물을 감각했을 때 일어나는 과정을 통해 설명된다. (그런데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정신인간 외부의 물질’, ‘비물질적 세계의 존재를 미리 전제한 후에 인간의 인식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고 요약자는 파악한다. ‘비물질적 세계가 의미하는 것은 실재이다.)

먼저,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며 육체가 외부 사물을 감각하지만 그것들의 인상을 만드는 것은 영혼이다. (왜냐하면 영혼과 육체는 본질적으로 다른데, 사물에 대한 인상은 영혼적인 것이므로 이러한 인상을 만드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다) 영혼은 육체가 감각한 사물의 상을 인식한 다음, 그것을 판단하거나 추상적 지식으로 나아간다. , a, b, c 를 인식한 다음 a가 아름다운지, 도덕적인지 판단하거나 1+1+1=3이라는 수학적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이성적 지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영혼이 비물질적 세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비물질적 세계, ‘아름다움’, ‘도덕’, ‘수학적 지식이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인간은 영혼의 작용을 통해 지식의 최하위의 단계로부터 더 높은 단계의 감각적 지식보다 더 확실한 것이라 가정된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최상위의 지식은 신에 대한 지식이다. 이러한 인식론이 함의하는 사실은 1)자연, 2)육체, 3)영혼, 4)비물질적 세계로 구성되는 존재론이다. (자연, 육체는 현상이며 비물질적 세계실재를 의미한다고 요약자는 파악한다.

위에서 우리는 대상을 감각한 후에 판단(아름답다, 도덕적이다)과 추상화(직선이다, 곡선이다) 함으로써 실재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은 신에 의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유한하고 불완전하다. 반면 실재와 신은 무한하고 완전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이것들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

Q1.3 ‘확실한 앎은 어떻게 가능한가?

 

2.3. 실재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

플라톤은 이에 대해 우리의 영혼은 본래 비물질적 세계에 있었기 때문에 상위의 지식을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어떤 강을 건너는 바람에 다 잊어버렸다가 상기를 통해 다시 그 지식을 알 수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영혼의 기원 영혼이 어쩌다가 이 세계로 내려온 것이냐 등 에 대해서도 답해야 한다는 부담이 뒤따르기에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은 감각적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빛(태양으로 인한)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비물질적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계시(신으로부터의)가 필요하다. 우리는 감각 대상을 지각할 때 빛의 도움을 반드시 받는다. 이와 비슷하게 빛이 실재를 비춰줘야만 인간의 영혼이 그 대상을 가리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빛은 물리적인 빛이 아니며 신의 계시이다. 계시는 우리 영혼 안에 내재되어 있다.

이로써 Q1.은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전에 선행되어야 하는 물음인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확실한 것에 대한 앎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 답했다. 이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존재론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신은 존재한다.’는 제 1전제였다. Q1에 답하기 이전에 Q1.4 신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Q1.5.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 두 질문에 답한 이후 비로소 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답해야 할 것이다.

  

3.    존재론

3.1. 신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영원한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신이 필요로 했다. 인간 정신은 유한한데 무한한 대상에 대한 앎은 가능하기 때문에 신이라는 무한한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신은 플로티누스가 말한 존재 없는 일자가 아닌 최고의 존재이며 완전한 존재이다. , 신은 자존적, 불변적, 영원한 존재이다. 다음으로 열거되는 신의 특징으로는 (1)단순성: 신의 지식, 지혜, , 능력 모두가 하나이다. (2)일상 세계는 신의 존재와 활동을 반영한다. (3)신은 시공간 밖에 존재하므로 변화(존재, ) 없다.

 이러한 신의 특징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원한 대상에 대한 지식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따라서 신은 세계를 초월해 있지만 세계는 신의 사유를 반영해야 한다. 그렇다면 신을 알 수 있다면 세계와 인간의 참된 모습도 알 수 있게 된다.

3.2. 세계는 어떻게 존재?

 그렇다면 신과 세계는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1]세계는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이며 [2]세계는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가?

[1]세계는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인가? 신은 ''에서 세계를 창조했다. 신은 오직 '' 것만을 만들 있으므로, 물질은 본질적으로 선하다. 

[2]에 대한 답으로 제시된 것이 배아의 원리이다. 사물, 동물은 자신에게 다른 형태의 존재를 야기할 인과적 힘이 없다. 신에게만 그러한 힘이 있다. 신은 이들에게 '배아의 원리' 주입했다. 원리에 의해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를 낳을 있는 것이다.

이제 Q1.은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 답해야 한다.

Q1.5.은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Q1.6.무엇인가가 결핍되기 이전 상태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

이 상태를 정상적상태라고 한다면,

Q1.7.정상적상태가 파괴되어 비정상적상태, 은 왜, 그리고 어떻게 발생하는가?

지금부터 Q1.5., Q1.6., Q1.7.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답을 살펴볼 것인데, 이 질문들이 해당되는(적용되는) 상황은 (1)개인적 차원과 (2)사회적 차원 두 가지로 나뉜다. 4에서는 (1)개인적 차원에 대한 대답을 다루며, 5에서는 사회적 차원에 대한 대답을 다루겠다.

 

4.    도덕철학

인간의 영혼은 불완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행복을 원하며 도덕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행복을 얻을 있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적인 것들에는 회의했기 때문에 행복의 길을 신에게서 찾아야 했다. 앞에서 제시된 것처럼 우리 인간에게는 신의 흔적이 묻어있기 때문에(‘계시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 이것은 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부여된 특정 목적을 완성해야 하며 그러한 목적은 자연적인 기능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아마도 아우구스티누스한테는 확실한 것으로 다가오지 못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도덕적 물음에 있어 확실한 것은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자연 밖의 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을 추구한다는 것은 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4.1.  사랑의 역할

[1] 인간은 사랑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랑할 있는 대상은 (1)사물, (2)타인, (3)자기 자신 모든 것이다. 그렇다면 요구되는 대상에 따라 인간의 사랑은 (a)사물에 대한 사랑 (b)타인에 대한 사랑 (c)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d)신에 대한 사랑으로 분류할 있다. 그런데 각각의 사랑은 오직 대상들에 의해서만 충족될 있다.  이러한 사랑 인간의 고유한 요구는 신에 대한 사랑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만 인간은 궁극적인 행복을 얻을 있다.

바로 이러한 상태가 Q1.6.’무엇인가가 결핍되기 이전 상태(=정상적 상태)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다.

[2] 인간의 사랑에 있어 도덕적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은 (1)사랑의 방식 (2)기대감이다. 인간이 무엇을 사랑한다는 사실 또는 사랑하는 대상 자체는 전혀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타인과의 사랑을 통해 (무한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킬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이것은 잘못된 사랑의 방식인데, 이를 가리켜 '무질서한 사랑'이라 한다.  '무질서한 사랑' 병적 증세를 일으킨다. 어떤 사람은 애인과의 사랑을 함에 있어 자신의 '무한자에 대한 사랑' 만족시키고자 잘못된 기대감을 가질 있다. 그렇다면 그는 애인에게 너무 요구를 하게 되고 상대방과 자신 모두에게 상처를 입힌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은 먼저 신에 대한 사랑을 만족시킨 다음에야 '무질서한 사랑' 없이 '타인에 대한 사랑' 있다고 보았다.

위 설명이 바로 Q1.7.의 상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답이다.

4.2.  악의 원인으로서의 자유 의지

 악의 원인은 무엇인가? 플라톤은 '무지'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악인이라도 타인의 행위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어떤 행위가 옳고 그른지 일반적 도덕 원리에 부합하여 판단할 있다. 누구나 일반적인 도덕 원리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각각의 인간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도덕 원리와는 부합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있다(자유 의지를 가진다). 그렇다면 악의 원인은 '무지'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에 있다. (그렇지만 인간이 잘못 선택하는 이유는 그러한 선택이 자신을 행복하게 것이라는 '잘못된 기대' 때문이고, 이러한 '잘못된 기대' '무지' 아닐까?)

자유 의지의 존재 또한 의 원인이다. 따라서 자유 의지의 존재는 Q1.7.의 상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두 번째 답이다.

 

5.    정의

4절에서는 개인의 도덕에 대해 살펴보았고 이제 사회의 도덕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물론 사회의 도덕 또한 개인의 도덕과 같은 원리를 가진다. 그러니까 사회의 도덕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답은 우리가 개인의 도덕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제시한 방식과 같다. 더욱이 아우구스티누스는 개인의 도덕과 사회의 도덕은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개인에게 옳은 것은 사회적으로도 옳다)

법의 근본적인 근거/원리는 '신의 이성'로부터 도출되는 것이어야 한다.  '영원의 ' 자연이 질서를 유지하도록 신이 부여한 원리이다. '자연법' '영원한 ' 인간이 인식한 것이다. '정의' 신에 의해 주입된 인간 본성에 기인한 영혼의 습관이다. 따라서 '정의' 영원한 것이다. '정의' 신에 대한 사랑이며 타인에 대한 사랑이다. 이것을 '사랑의 원리' 한다. 

 법은 '자연법' 근거해야만 하며 '정의' 표준과 부합해야만 한다. 이러한 법을 가진 국가만이 존재의 정당성을 가진다. 

"만일 국가가 백성의 소유물이고 백성들 모두가 법적 동의에 의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정의에 기초하지 않은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국 정의 없는 국가는 존재할 없다"  (p225)

국가는 만인을 통제, 강제하는 힘을 가진다. 이것을 '힘의 원리' 한다. '힘의 원리' '자연법' 근거했을 '통제의 대리자'로서 힘이 인정된다. 하지만 '힘의 원리' '정의' 근거하기 때문에 '정의' 고귀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구체적 상황에서 구체적인 '힘의 원리' 제시될 때마다 그것은 '정의'에서 논리적으로 뒤따라 나온다는 것이 증명될 때에야 비로소 정당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의 설명대로 자연법에 따라 법이 만들어지고 이에 따라 국가가 운영되는 상태가 바로 Q1.6.’결핍되기 이전 상태란 어떤 상태인가?에 대한 답이다. 법이 자연법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거나 또는 국가가 자연법에 따른 법과 무관한 운영을 시행할 때 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이유는 인간의 자유의지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Q1.7 ‘은 왜, 그리고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대한 답이다. 

앞으로 이어질 6절의 내용은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의 7(p226~p228)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이 Q1.은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는가? Q2. 우리는 악을 어떻게 극복 또는 감소시킬 수 있는가? 라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직접적인 대답인지 아닌지는 요약자는 확신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Q1Q2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대답에 근거한다면 첫째, 인간의 역사에서 보편적인 원리를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며 둘째, 인류의 역사적 차원에서 Q1.은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는가? Q2. 우리는 악을 어떻게 극복 또는 감소시킬 수 있는가? 라는 두 질문에 대한 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6.    역사철학

6.1. 개의 나라

 위에서 제시한 것처럼 인간은 사물, 타인, 본인 등의 자연을 사랑할 수도 있고 신을 사랑할 수도 있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 저지르거나 '정의롭지 않은' 국가를 형성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럴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전자의 집단을 <지상의 나라>, 후자의 집단을 <신의 나라> 분류한다.  사회 안에 집단의 사람들이 모두 존재하며 집단 지배적인 집단의 성격이 사회의 성격을 결정한다.

6.2. 역사철학

아우구스티누스는 역사철학의 가능성을 보았다. , 어떤 보편적인 원리에 따라 역사가 진행될 있다는 것이다. 원리란 바로 <신의 나라> 분류되는 집단과 <지상의 나라> 분류되는 집단 간의 갈등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역사적 차원에 대해서도 다음 질문들이 가능하다.

Q1.은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는가?

Q1.5.은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은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는 상태이다.

Q1.6.무엇인가가 결핍되기 이전 상태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

Q1.7.정상적상태가 파괴되어 비정상적상태, 은 왜, 그리고 어떻게 발생하는가?

 

Q1.6.에 대한 대답은 모든 사람이 <신의 나라>의 집단에 속하는 상태일 때가 바로 정상적인 상태이다일 것이다.

Q1.7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지상의 나라>에 속하게 되어 <신의 나라>의 사람들과 전쟁을 하게 될 때 은 발생한다고 답할 수 있다.

 

참고문헌

새뮤얼 스텀프,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2016, 이광래 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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